마지막 의사는 벚꽃을 바라보며 그대를 그리워한다.
안녕하세요.
마지막 의사는 벚꽃을 바라보며 그대를 그리워한다.입니다.
소설뿐만이 아니라 창작되는 모든 작품에서 의료는 일대의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사가 주인공인 만화라면 저 같은 경우에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기에 블랙잭이 처음이었습니다만,
영화든 한국 드라마든 하나의 장르처럼 정립되어 나오는 작품들이 많죠.
주인공인 의사 또는 간호사가 병원에서 난치병을 앓는 환자, 목숨이 경각에 다다른 환자들을 마주하며
때로는 고민하고, 갈등하면서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메스를 휘두르는 모습은 어떻게 보아도 멋있습니다.
그리고, 의료 물이라고 해도 주제는 광범위하기에 의료현장 전반에 파고든 작품도 적지 않습니다.
시스템으로서의 병원의 문제와 모순에 가까이 접근하는 만화나, 병원을 여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도 있으며,
픽션 작품, 논픽션 작품도 수두룩 합니다.
이번에 읽은 마지막 의사는 벚꽃을 바라보며 그대를 그리워한다. 는
메인 캐릭터인 세 의사의 개성적이고 특히 두 명은 자석의 극과 극 같은 존재로 그려져 있어,
서로 반대 방향을 걸으면서도 둘 다 벚꽃(환자)을 바라보고 있는 책의 일러스트와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이런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그려내는 그저 그런 스토리가 아닌,
작품 내에서 그려지는 죽음은 아주 선열 합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오는 것이고, 불합리하게 정신을 괴롭히는 두려움으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만들어진 이야기이지만, 역할 정도로 죽음만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사람은 언젠가 죽습니다. 사람의 생이란 것은 치사율이 100%죠.
삶이 모든 것을 손에 넣을 기회를 준다면, 죽음은 모든 것을 잃게 되는 필연이죠.
이 작품은 현대의 누구에게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죽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아픈 경험이 있다면 괴로운 독서가 될 수 있지만, 그렇기에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죠.
이 이야기에는 뚜렷한 한 명의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개성 있는 3명의 의사가 있습니다만,
책 전반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의사와 환자, 그리고 의료와 죽음에 대한 본연의 자세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그대로 글을 내려주세요.
의사 1명은 병원의 부원장으로, 천재 외과 의사 후쿠하라 마사카즈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누구보다 많은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데 집념한 열의를 불태우며,
기적은 일어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열혈 타입입니다.
정의감 덩어리 같기도 하고 다른 작품이라면 틀림없이 주인공으로 내세울 남자입니다.
그런 후쿠하라와는 극과 극인 피부과 의사 키리코 슈지가 있습니다.
기적 따위는 믿지 않고 천 마리학은 쓰레기밖에 안 된다며 감정보다 효율을 우선시하며,
사물의 본질을 중시하는 리얼리스트입니다.
완치 가능성이 낮고 고통스러운 삶을 오래 끌 정도라면 죽음을 택하도록 하죠.
수많은 환자를 그렇게 타이르고 배웅해 왔다고 해서 저승사자로 불립니다.
그런 2명과 의학생 시절부터 사이가 좋은, 내과의사 온 야마 하루오가 있습니다.
방침의 차이로 충돌하기 쉬운 2명을 주선하면서도,
명확한 신념을 가지지 않는 자신에게 초조감을 느껴 2명을 눈부시게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항상 이 세 사람의 시각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1, 2장은 이들이 마주하는 〈환자〉, 두 사람의 주관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죠.
즉, 본작은 〈의사〉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죽음」으로 향해 악화되어 가는 병세를, 〈환자〉시선으로 뒤쫓는 구성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더 덧붙이자면 원래 장의 제목이 스포일러가 되어 있습니다.
뭐니 해도 1장이 '어떤 직장인의 죽음', 2장이 '어떤 대학생의 죽음'인 것입니다.
읽기 전부터 사망 확정인 걸까.. 기적이란 것도, 마법이란 것도 없이
한번쯤은 살 수도 있지 않는 걸까.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적인 반전은 없고 드라마적 기적도 일어나지 않아 둘은 죽습니다.
물론 그 과정은 잘 그려져 있죠.
이 세상의 불합리를 저주하고 의사가 제시하는 선택지에 대해 고민하고,
남겨지는 자를 생각하며 울부짖으며 죽음으로 향하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듭니다.
모든 것이 확률, 확률, 확률, 확률, 뿐입니다. 여러 확률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냥 살고 싶을 뿐인데,그동안 숨을 쉼으로써 간단하게 해오던 일인데, 다른 사람들도 평범하게 살아 있는데,
무수한 갈림길이 눈앞에 있고, 어딘가에서 미래의 자신이 힘쓰고 있습니다.
시체가 되는 미래로 가는 길과 정답의 길을 알아맞힐 수 있을까요.
병을 고치려면 살아남으려면 후쿠하라처럼 싸워야 합니다.
몇 % 확률로 성공하는 수술에 임하고, 수술 후에는 몇 % 확률로 쾌복을 향합니다.
하지만 몇 % 확률로 재발 우려가 있고 몇 % 확률로 다른 병을 앓게 됩니다.
만사가 잘돼도 몇 년 뒤 생존율은 몇 %에 불과합니다.
작품 내의 회사원은 말합니다.
죽이고 싶다면 조용히 죽여! 내가 알아채기 전에, 불안에 사로잡히기 전에 단숨에 목숨을 빼앗아 가면 되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왜 선택지를 수도 없이 남기고 치료법에 확률 같은 것을 만들어 놓는 거야?
왜 죽음이 마치 내 선택에 의한 결과인 것처럼 꾸미느냔 말이야. 그거 알아? 덕분에 난 잠도 자지 못해..
아무리 고민을 하더라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고!
하마야마는 이를 악물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제발.. 이런 선택을 나한테 시키지 말아 줘.. 죽음이 있어도 괜찮아, 달아나지 못해도 괜찮아,
희망을, 눈앞에 들이대는 짓만은 하지 말아 줘, 난 못해. 완전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편이 차라리 나아.
희망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건 괴로워,
노력이나 운에 따라 손이 닿는 곳에 놓여있던 것을 뺴앗기는게 더 괴로워..
희망을 줄 거면 100%의 희망을 줘, 100퍼센트로 낫게 해 달라고...
죽든 살든 모든 것이 운과 확률론입니다.
무수한 무기질의 「선택지」의 상당수는, 죽음에 처한 환자를 정신적으로 몰아가죠.
그렇기 때문에 「저승사자」 키리코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과 마주하고, 그 방황을 풀려고 합니다.
죽음 앞에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 스스로의 의사로 선택한 삶을 가지고 죽음을 이겨내는 것이라고.
생명의 가치는 길이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정한 사용법에 있다고.
키리코는 마치 선문답 같은 말을 하마야마에게 하죠.
죽음에 휘둘리면 왕왕 사는 법을 잃어요.
삶의 방식을 잃은 삶은 죽음이나 다름없을까요?
반대로 삶의 방식을 유지하다 죽는 것은 삶과 같다고 할 수 없을까요?
1, 2장에서 그려지는 것은,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의 궁극의 선택의 틈에서 흔들리는,
절망적인"환자의 시선"입니다.
2명의 환자는 「저승사자」의 말에 따라, 스스로 존엄사를 선택하게 됩니다.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런 단순한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본작의 주제가 숨겨져 있죠.
절망에 처해 두 환자가 보여준 선택은 이어지는 3장에서도 관련이 있습니다.
존엄사냐, 연명치료냐.
'의료 물'의의료물' 작품으로는 왕도라고도 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룬 이야기의 마지막 장입니다.
3장에서 그려지는 것은… 이 또한 장 제목 그대로, '어떤 의사의 죽음'. 3명의 의사 중 누군가가 죽게 됩니다.
허구의 소설로 현실의 죽음을 통한 삶의 견해를 찾는 것입니다.
끝까지 다 읽고 가장 먼저 느낀 것이, 본적이 그리고 있는 것은 애초에 「리얼한 의료 현장」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장르는 「의료」로 분류될 것이고, 무대도 병원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무대 설정"에 지나지 않고, 본질적인 테마는 따로 있습니다.
본작에는 3명의 〈의사〉가 있고, 3명의 〈환자〉가 있습니다.
저마다 인생이 있고, 소중한 가족이 있으며, 친구가 있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픽션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픽션들 속에서, 작중에 그려져 있는 죽음이라는 것만이 어딘가 많이 달랐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선명하고 사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 소설이 파고든 것은 현대에 사는 인간의 죽음을 통한 삶의 견해를 찾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다 읽은 지금은 생각합니다.
「감동」이라고 하는 말에 도배되어 좋지도 나쁘지도 "이야기"로서 단순화되어 버린,
죽는 사람과 마주하는 방법을 말입니다.
기적과 가능성을 믿고 끝까지 싸울 것을 강요하는 후쿠하라와,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 자신의 의지로 살아남기 위해 죽음을 제시하는 키리코.
본래라면 개개인에게 다른 선택이 있어야 하는데 마치 어느 한쪽이 정의롭고 양자택일인 것 같이 느껴집니다.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이 막상 죽음에 직면했을 때, 드라마나 영화 속에 나오는 편집되고 아름답기만 한 삶의 견해에
현혹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소설이라는 허구로 의료 물의 아름답기만 한 이상향을 무너뜨리고,
본질적인 삶과 죽음을 되찾으려는 듯했습니다.
정말 재밌게 보실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의료물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추천드립니다.